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문단 편집) === 집권과 폭정 === >'''우리는 폭력으로 흔들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평화의 통치 아래 통치해 왔습니다.''' >----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이 아닐 수 없다. [[https://www.nytimes.com/1975/01/21/archives/stroessners-reign-of-peace-in-paraguay-has-a-price.html|출처]] [[1954년]] [[5월 4일]] 군대와 자신이 소속된 [[콜로라도당(파라과이)|콜로라도당]]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대통령 페데리코 차베스를 축출했다. 토마스 로메로 페레이라가 이끌던 짧은 임시 정부[* 1954년 5월 5일 ~ 1954년 8월 15일] 이후 그는 다른 모든 정당들을 금지시키고 동년 [[7월 11일]]에 열린 특별 대선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만장일치]]로 파라과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54년]] [[8월 15일]] 제50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헌법과 시민권을 정지시켰으며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고 1958년, 1963년, 1968년, 1973년, 1978년, 1983년과 1988년에 [[부정선거]]를 동원해 7번이나 재선하면서[* 71.6%의 득표율을 기록한 [[1968년]] 대선을 제외하면 모두 84% 이상의 득표율을 확보했다.] 장장 35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으며[* [[20세기]]는 물론이고 전체 [[아메리카]]의 지도자 중에선 [[피델 카스트로]] 다음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참고로 피델 카스트로는 20세기 아메리카 지도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비군주 지도자 중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1967년]] [[8월 25일]]에는 1968년 선거 이후에 만료된 임기만 그 한도에 포함되도록 규정하는 식으로 헌법을 개정하며 5년 임기로 3선 출마를 허용했고 원래대로라면 권력을 내놓아야만 했던 [[1977년]]에는 5년 임기로 무제한 출마가 가능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이 장기집권의 트라우마로 인해 파라과이의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제로 제한되고 있으며 실제로 [[2017년]] 입법부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오라시오 카르테스]]가 재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수정안을 논의했을 때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결국 백지화되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정부가 재판 없이 누구든지 무기한 체포하고 구금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공개 집회나 시위도 금지했고 국민들은 콜로라도당에 가입해야만 직업과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선거 기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 동안 계엄령을 선포한 채 국가를 통치했다. 더불어 정부나 여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금지해 많은 언론인들이 감옥에 보내지거나 [[고문]]을 당해 파라과이에는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스트로에스네르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파라과이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면서 이러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덤으로 [[1975년]]부터는 남미 6개국[*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의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목적으로 공동적으로 실시한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파라과이 정치 전반에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했는데 [[1947년]]부터 집권 여당인 콜로라도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62년]] 야당의 활동이 다시 합법화되었지만 제대로 된 활동은 거의 용납되지 않았고 탄압도 계속됐으며 전술한 것처럼 선거는 콜로라도당에 유리하도록 조작되었기 때문에 야당은 현실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1974년]] 11월에 아순시온 외곽의 농가에서 체포된 게릴라 7명이 심문 과정에서 '스트로에스네르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콜로라도당의 고위 관리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 것이 알려지자 스트로에스네르는 당 지도부를 의심해 1천 명 이상의 고위 관리와 당원들을 체포하고 심문하도록 명령했으며 덤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요원을 보내 해외에 망명한 자신의 정적들을 납치하게 했다. 스트로에스네르의 정적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최고점에 달했는데 한동안 그가 집권했을 때 1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하고 40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4천~5천 명이 사망했다는 말이 돌았으나 2008년에 파라과이 진실과 정의 위원회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19,862명이 투옥되어 18,722명이 고문을 당하고 3,470명이 추방당했으며 377명이 '실종'되고 59명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2019년 9월에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옛 저택에서 반정부 인사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027090|#]] 스트로에스네르 치하에 행해진 고문들은 여느 남미의 군사정권처럼 마찬가지로 아주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의 반대파들에게는 구타, 채찍질, 3일 동안 잠도 안 재운 채 서 있게 하기[* 기절하면 그를 강제로 목욕시키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민감한 부위에 전기고문하기, 냄비를 머리에 얹고 쇠로 두드리기,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 사람들을 몇 주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은 채 빈 트렁크에 가두기 등의 야만적인 고문이 행해졌으며 특히 가장 많이 쓰이던 고문은 정적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배설물이 담긴 욕조에 강제로 담가 질식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체제 인사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지른 비명 소리는 녹음되어 가족들에게 전화로 재생되었고 때로는 유족들을 위협하기 위해 수감자가 이미 살아 있음에도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도록 피 묻은 옷이 유족들의 집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치범의 심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파라과이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겔 앙헬 솔레르[* Miguel Ángel Soler, 1923~1975. 1946년 모리니고 정권이 일시적으로 정치 자유화 조치를 내렸을 때 외무장관직을 역임한 이력이 있으며 1950년 초 파라과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체포되기 직전에 자신이 운영하던 '앞으로(Adelante)'라는 지하 신문에 실어 출판할 후술할 스트로에스네르의 성추문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고발을 뒷받침할 자료들과 증언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가 체포된 후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될 때[*열람주의 솔레르는 문자 그대로 '''산 채로 전기톱으로 썰려 죽었다고 한다.'''][* 솔레르의 유해는 2009년 12월 23일에 경찰 특수 그룹의 개인 무덤에서 파편으로 발견되었고 2016년 8월 30일에 신원이 확인되면서 솔레르는 스트로에스네르 시기의 사망자 중 유해가 발굴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원이 확인된 인물이 되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발견된 스트로에스네르 시기 사망자의 시체 36구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솔러의 것을 포함해 4구에 불과하다.] 스트로에스네르는 그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전화로 엿듣고 있었다. 특히 1968년부터 파라과이 수사부장이었던 파스토르 코로넬[* Pastor Coronel, 1919~2000. 수사부에서 일하기 전에는 교육문화부에서 일했으며 120kg에 달하는 거구였다고 한다.]은 스트로에스네르에 대한 반대파에 대한 체포, 납치, 심문, 고문, 암살을 주도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반대파에 대한 심문, 고문에 참여했는데 심지어 앙헬 솔레르의 살해도 코로넬의 사무실 안에서 코로넬 본인이 '''직접''' 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가입한 콜로라도당 소속의 [[민병대]][* 이들은 콜로라도 행사에서 [[마체테]]를 높이 들어보이는 상징적인 행위를 하며 '마체테로스(Macheteros)'라고도 불렸다.]를 이끌면서 반대파에 대한 폭행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고 자신의 소유지에 정적들의 시체를 [[암매장]]하기도 했으며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와도 함께 마약 밀매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비록 1980년 9월 17일에 파라과이로 망명을 온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사주를 받은 아르헨티나의 게릴라에게 암살되자 코로넬의 위상은 추락했으나[*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는 소모사의 안전을 개인적으로 보장하며 그 조항을 코로넬에게 맡겼다.] 그럼에도 코로넬은 스트로에스네르가 물러날 때까지 수사부장 직함에 있었다. 그리고 스트로에스네르는 본인에 대한 [[우상화]]도 자행하여 수도인 [[아순시온]]의 중앙광장에 '스트로에스네르: 평화, 힘, 그리고 안녕(安寧)'이라는 내용의 대형 네온사인을 설치한 것은 물론이고 도로, 광장, 학교, 공항 등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모든 관공서와 대부분의 상점, 심지어 정적들의 집에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고 동부 국경 지역에 자기 이름을 붙인 선전도시 [[푸에르토프레시덴테스트로에스네르]][* 번역하면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의 항구'라는 뜻이다.]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 도시는 [[1989년]]에 시우다드델에스테로 개칭되면서 스트로에스네르의 흔적을 지웠다.]. 심지어 자기 생일을 '행복한 날(fecha feliz)'이라고 부르면서 [[공휴일]]로 지정해 아침부터 밤까지 성대하게 생일파티를 열기도 했는데 이 생일잔치에서 스트로에스네르는 '그가 파라과이의 수호성인인 것처럼 기념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이 시기 파라과이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군사정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선전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아들이 군사 퍼레이드를 보고 "아빠 나도 군인이 되고 싶어요." 이러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넌 이미 군인이란다."라고 답을 해 주는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 스트로에스네르는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파라과이의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과 [[학살]]을 실시했는데 실제로 아체(Aché)족은 전체 인구의 85%에 육박하는 900명이 학살당했으며 여성들은 [[성노예]]가 되었고 아이들은 '하인처럼 만든다'는 이유로 [[유괴]]되었다[* 다만 이 원주민 학살은 대부분이 농부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특정 대상에 대한 멸족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으나 적어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이 학살을 방치했다는 것만큼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로에스네르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한테 배웠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 중 하나인 [[과라니어]]를 부흥시키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